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들은 나의 어린 시절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어머니가 어딘가에서 구해오신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 <이웃집 토토로>, <천공의 성 라퓨타>, 그리고 <모노노케 히메>를 틈만 날 때마다 봤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보았던 작품들이 대부분이라 작품 하나하나의 메타포를 이해하며 그 깊이를 음미하며 시청했다기보단 장면의 아름다움 그 자체만을 즐겨봤던 것 같다.
수잔 네이피어의 <미야자키 월드>는 어린 시절 추억 속에 남아있던 아름다운 장면들의 미야자키 월드를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와의 심층적인 인터뷰들을 통해 외적인 메타포들과 내적인 미야자키 감독의 인생을 통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감독의 내면 속에 자리 잡은 “죄의식과 부채감”은 그의 작품 세계 전반에 녹아 트라우마 그 자체를 표현한다. 이러한 감정들은 2차 세계대전 직전의 군수업을 통해 부유해진 미야자키 가족들이 공습을 피해 달아나는 상황에서 4살짜리 어린 소년이었던 미야자키가 들었던 소리에서 생겨났다. “저희 좀 태워 주세요.” 어린 여자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가 외친 소리를 어른들은 그대로 외면한 채 피난길에 올라 선 것이다. 군수업을 통해 부유해졌다는 부채감, 아이의 엄마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의식을 통해 그의 작품 속에는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다양한 인물들이 나온다.
부도덕한 어른들
미야자키 감독의 많은 작품들에는 부모는 대게 나쁘거나 부족하게 비치곤 한다.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에서는 어린 오무를 돌보려는 나우시카에게서 “인간과 곤충은 같은 세계에서 살 수 없다.”며 빼앗아 버린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부모는 욕망을 이기지 못해 남의 음식을 탐하여 돼지가 되어 버린다. <벼랑 위의 포뇨>에서는 일이 늦어져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아빠와, 양로원을 위해 포뇨와 소스케를 집에 남겨두고 가버리는 엄마가 나온다. 이러한 모습들을 통해서 미야자키는 과거 트라우마를 일으킨 사건 속 어른들의 부도덕함을 아직까지도 작품상에 반영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순수한 아이들
반대로 미야자키 감독은 아이들이야 말로 희망이라는 메세지를 전하고자 노력하였다.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의 나우시카는 "생명에 대한 남다른 공감 능력"을 통해 구원자로 거듭나게 된다. <이웃집 토토로>에서는 길을 잃은 메이를 찾기 위해 어린아이의 순수성을 회복한 사츠키가 토토로의 힘을 빌려 메이를 찾게 된다. <벼랑 위의 포뇨>의 소스케는 "물고기 포뇨도, 반어인 포뇨도, 인간 포뇨도"좋다고 말해 다름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미야자키 월드>에서 언급하는 미야자키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백사전>을 보고 내 눈을 덮고 있던 비늘이 벗겨진 느낌이었다. 아이들의 선함과 솔직함을 그려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부모들은 아이의 순수함과 선함을 짓밟으려고 한다."라고 했다. 과거 그의 트라우 마속 나약했던 4살짜리 소년이 하지 못했던 것들을 작품을 통해 시도한 것처럼 보인다.
진취적인 여성들
상당히 진보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는 미야자키는 그 만큼 진취적인 여성을 맨 앞에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1차원 적으로 남성의 역할을 대신하는 여성이 아니라, 공감과 포용을 통해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는 생명에 대한 공감 능력을 통해 분노에 가득 찬 오무를 진정시키고 구원자로 거듭나게 된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작품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으로 전통적인 '여자 주인공' 이미지를 탈피하여 늙은 노인을 정면으로 내세웠다. 특히 <미야자키 월드> 책에서는 "아흔 살 노인이 겪는 신체적 고통과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저주받은 소피는 오히려 해방감을 만끽하는 듯 보인다."라고 했고, "소피의 진짜 저주가 노인이 된 게 아니라 그전에 어린 소녀로 살아야 했던 것"이라는 주장도 언급하였다.
트라우마의 힘
재미있게도 <미야자키 월드>에서는 그의 트라우마는 사실 잘못된 기억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미야자키 감독의 형의 기억속에서는 트럭이 너무 작아 더 이상 사람을 태울 수 없었다. 또한 태워달라고 한 사람은 여자가 아닌 남자였고, 아이는 집에 두고 왔었다고 하였다. 진실이야 어찌 되었건, 이러한 트라우마는 그의 작품 속 뼈대를 구성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우리는 그의 엄청난 작품들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미야자키 월드>에서 "천재를 탄생시키는 데에는 가족, 유년기, 교육, 문화 같은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야 한다. 그리고 치유되지 않은 정식적 상처, 다시 말해 트라우마 역시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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