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의 탄생은 인생에서 손에 꼽는 경이로운 순간 중 하나일 것이다. 나와 생물학적 유전자를 공유하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보살핌을 받던 내가 누군가를 보살피기 시작해야 하는 순간이다. 새로운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과 나와 유전자를 공유하는 인류의 탄생에서 나오는 행복만이 존재할 것 같은 이 순간은 생명에 대한 책임이라는 막중한 의무가 뒤따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이후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나로서의 삶은 상당 부분 잃게 된다. 개인의 즐거움을 포기하며 아이의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 나의 수면권을 포기해가며 아이의 잠자리를 보살펴야만 한다. 작은 생명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순간이 올 때까지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관심 있게 지켜보며 매시간을 온전히 아이에게만 쏟아야만 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이의 행동력이 점점 늘어나면서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은 행동력이 늘어남에 따라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아이의 모습에 무너지는 순간이 오게 된다.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이유식을 뱉어가며 거부하는 아이와 밥상에서 씨름을 하느라, 밤 10시가 넘어 하루의 피곤이 밀려오는 그 순간에 자지 않겠다며 때를 쓰는 아이와 실랑이를 하느라, 하늘이 나에게 내려준 선물 같았던 아이는 어느새 전생에 나의 원수가 나를 괴롭히기 위해 찾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아이 점차 커감에 따라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은 점차 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짜증 또한 늘어만 갔다.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꼬물 거리며 무엇인가를 스스로 해내고 싶어 한다는 것이 대견스러우면서도, 마음 급한 한국인 중 하나인 나에겐 그저 시간만 지체되는 방해요인으로만 느껴질 뿐이었다.
우연히 지나가다 본 오은영 박사님의 육아 관련 영상들을 보며, 처음 영상에선 '저 아이는 문제아이기 때문에 저런 곳에 나오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영상의 중반부를 넘어가면서부터는 완전 반대의 생각이 든다. '부모가 제대로 못하는 것이 문제구나. 나는 다른 부모가 될 거야.'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직접 육아를 경험해보며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말해야 할까>는 내가 갖고 있는 육아 문제들을 해소해 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집어 들게 되었다.
결론만 놓고 본다면, 육아 스트레스와 아이의 짜증은 대게 부모의 잘못도, 아이의 선천적인 기질 때문도 아니었다. 아이는 아이인 자신이 처음이고, 부모 또한 부모학 전공자가 아닌 평범한 성인이라는 지점이 문제였다. 아이는 점차 커감에 따라 자신이 직접 선택하거나 행동하고 싶어하는 것이 늘어간다. 하지만 아이는 모든 행동이 처음이거나 미숙하다. 또한 다양한 감정 또한 생소하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화학반응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그저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스트레스 분출을 선택한다. 반대로 부모의 경우에는 철저히 어른의 입장에서 아이를 바라보게 된다. 뭐든 미숙한 아이에게 자신이 모든 것을 해주고자 하며, 부모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박살난 기대감에 짜증은 샘솟게 된다.
아이의 말은 표현 그대로의 뜻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아이가 세상에 나와서 쌓아온 시간의 양과 우리가 쌓아온 시간의 양은 너무나 차이가 납니다. 그 차이만큼 언어의 표현도 차이가 많이 나지요. 우리 시간의 깊이로 아이의 말을 받아들이지 마세요. 우리가 가진 세월의 깊이에 맞게 아이를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는 처음 부모가 된 나에게 "진짜 어른"은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 말해주는 친절한 교과서 같은 의미의 책이다. 확실히 책을 읽을수록 내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고, 마음이 달라진다. 이전에 읽은 <어린이라는 세계>, <나보다 소중한 사람이 생겼다>, <적당히 육아법>을 통해 어렴풋 알게 된 어린이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에 대한 배경 지식을 충분히 익혔다고 생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아이를 아이로 받아들이지 못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재미있는 부분은 나의 시선과, 행동, 마음이 달라짐에 따라 아이의 시선, 행동, 마음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되는 것과 안되는 것에 대해 구분하려 노력하고, 때를 쓰거나 억지를 부리는 것 같은 행동이 상당수 줄어들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전보다 더 나를 사랑해주려 노력하는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마법 같은 기적을 바라고 읽은 책은 아니었지만, 여러모로 마법의 시작이 된 책이 아닌가 싶다. 지금은 비록 빌려 읽은 책이지만, 꼭 가슴속에 소장하여 두고두고 읽어 두면 좋을 것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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